모든걸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열심히 써내려가던 단편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글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허무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기뻤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 백지 도화지 앞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그려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단순히 물감, 도구, 손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점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를 이렇게 해석해보았습니다.
물감은 돈, 도구는 능력, 손은 건강이라고.
제가 저를 기억하고, 남들도 저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 모든 것을 한 곳에 모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것, 그것 또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꾸만 외부의 자극과 사람들의 관심, 인정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려는 제 내면 깊숙한 욕구를 잠시 내려놓고, 왜 제가 그렇게까지 살아 있음을 느끼려 하는지 그 이유에 집중해보고자 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철학자들마저 답을 찾으려 애썼던 이 해결책 없는 질문에, 우리는 과연 답을 찾을 자격이 있는 걸까요. 드러내기를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 빈틈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 빈틈은 초라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비워내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그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단단해져 가는 저를 느낍니다.
언젠가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며 다시 이어질 때쯤 돌아와서 다시금 바라보겠습니다.
어이없게 끝난 순간에도 새롭게 시작할 도화지가 있다는 사실에 설레면서.